[손석희의 앵커브리핑] '하나 둘 셋 스윙!'

Newsroom 2019. 7. 2. 11:21 Posted by applyingusa

뉴스룸의 앵커브리핑을 시작합니다.

 

넘어가고. 다시 넘어오고 그리고 다시 넘어가고.

 

똑같은 장면이 똑같은 장소에서 다시 이뤄지는 순간을 바라보면서 저 적당한 높이와 너비의 경계선은 이제는 되레 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하는 부질없는 생각까지 하게 됐던 어제였습니다.

 

그런 생각이란 것도 사실 1년이 조금 넘는 짧은 시간 동안에 그 경계선을 둘러싼 변화가 가져다준 것이겠지요.

 

분단의 경계선을 넘어서는 모습은 그렇게 비현실적인 느낌을 주기도 했지만사실 각자의 머릿속은 매우 현실적인 복잡한 셈법으로 가득하다는 걸 모르는 바도 아닙니다.

 

누군가에겐 당장 내년의 선거가 걸려 있을 것이고 남과 북의 사람들에게 핵과 평화란 그 자체로 명운이 걸린 문제이기도 하니까요.

 

그래서 누군가는 파격, 즉 격을 파하고, 누군가는 그 파격에 응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은 짐짓 한 발 뒤에 서 있던 것이고요.

 

그 세 사람을 보면서 역사의 진전이란 우연일까 필연일까를 다시 생각하게 한 하루

 

지난 5. 남북한이 맞닿은 비무장지대 안에 있는 도라 전망대에 그네가 한 대 생겼다고 합니다.

 

주황빛 기둥이 단단히 뿌리박은 이 그네는 조금 낯선 모양을 하고 있었지요.

 

서로 다른 이들이 호흡을 맞춰가며 타야 하는 3인용 그네였습니다.

 

누군가 한눈을 팔아서도 안 되고. 똑같이 발을 구르며 마음을 모아야만 그네는 중력을 거스르고 하늘로 올라갈 수 있다는데

 

당연히 쉬울 리는 없습니다.

 

그러나. 세 명이 눈과 마음을 모은 뒤 똑같이 발을 구르며 하늘로 올라가면

 

비로소 시원하게 눈에 담기는 한반도 북쪽의 풍경

 

비무장 지대북쪽 하늘을 향해 세워진 그 3인용 그네의 이름은

 

'하나 둘 셋 스윙!'이었습니다.

- 수퍼플렉스 / 자료 : 리얼디엠지 프로젝트

 

그리고 그네가 설치된 지 한 달 만에 공교롭게도 세 사람이 모여서 발 구르기를 시작한 셈이니.

 

이 그네가 설치된 것도 우연이었을까 필연이었을까라는 다소 부질없는 생각이 또 떠오른 하루

 

오늘의 앵커브리핑이었습니다(2019.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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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 카뮈' (1913~1960)

 

실존을 이야기한 작가.

 

그러나 하마터면 우리는 그를 '작가'가 아닌 '축구선수'로 기억할 뻔했습니다.

 

그는 열일곱 살이 될 때까지 학교의 축구 대표선수로 활동했으나 가난과 결핵으로 선수의 꿈을 포기했다고 하지요.

 

그것이 얼마나 안타까웠는지.

 

'인생을 다시 산다면 축구와 문학 중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걸 말이라고. 당연히 축구지!"

 

심지어 그 축구에 대한 미련은 길게 이어져서 1957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된 뒤에는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은 오직 축구에서 배웠다"는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어제 새벽.

 

그리고 어제 새벽이 있기까지

 

스무 살이 채 안 된 선수들의 그 극적인 승부를 지켜보며 사람들은 새삼 축구를 다시 배웠습니다.

 

"언어가 아닌 것을 주고받으면서

이토록 치열할 수 있을까"

- 문정희 < 축구 >

 

한 시인의 말을 빌리자면 축구란 그야말로 '언어가 아닌 것을 주고받으면서 이토록 치열할 수 있는' 눈부심이었던 것이지요.

 

반대로 지금의 세상은 생각이 다른 사람에겐 절대로 공을 넘기지 않으려는 막말과 다툼으로만 가득하니

 

"형들이 저를 많이 도와주셔서" 이강인 선수

"'빛광연'이 잘 막아 줬다" 최준 선수

"다른 골키퍼들이 뛰었더라도 빛이 났을 것" 이광연 선수

 

나를 높이기보다 동료를 더 높이고자 했던 어린 선수들의 말은 조금 교과서 같은 첨언이긴 하지만어른들의 세상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해주었다고나 할까.

 

물론. 사는 일이란. 90분 안에 마무리되는 축구 경기와는 사뭇 달라서 축구와 삶을 하나하나 비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공은 기대하는 방향에서는 결코 오지 않는다"

- 알베르 카뮈

 

축구를 꿈꾸었으나 좌절한 카뮈의 인생이 그러했듯 선함이 반드시 선한 결과를 가져오지 않을 때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축구로부터 배워야 하는 최소한의 것들은

 

바로 이런 것들이 아닐까

 

경기장에 서면 온 힘을 다해 뛰어야 한다는 것. 누군가 반칙이나 꼼수를 부린다 해도 모두가 바라보고 있기에 결국 그것은 통하지 않는다는 것

 

"그걸 말이라고. 당연히 축구지!"

 

이러니 카뮈는 끝내 미련을 버리지 못한 것일까

 

오늘의 앵커브리핑이었습니다. (2019.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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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년 전, 저는 이미 퇴임한 대통령을 2번이나 인터뷰했습니다.

 

마지막이 된 두 번째 인터뷰는 그의 동교동 자택 거실에서 있었지요.

 

"이 거실에서 이렇게 긴 시간 동안 인터뷰한 사람은 당신뿐"이라고 그는 저를 추켜세우기도 했습니다.

 

이 인터뷰 얘기는 과거에 앵커브리핑에서 잠깐 쓰긴 했습니다만

 

오늘은 그때 그 장면에서 숨겨져 있던 1인치랄까

 

그 속에 있던 사람에 대한 얘기입니다.

 

그날 인터뷰가 끝나고 물러가려는 저를 그는 돌려세웠습니다.

 

아니 정확하게는

 

저를 돌려세운 사람은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이희호 여사.

 

그렇게 해서 제가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서 "고향이 호남도 아니면서 무슨 삼합을 그리 좋아하느냐"는 핀잔 아닌 핀잔을 들었던 점심을 먹고 오게 된 것이지요.

 

아래위 흰 정장을 차려입은 이희호 여사는 식사를 시작할 때 했던 한 마디

 

"많이 드세요"를 빼고는 식사가 끝날 때까지 거의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조용한 가운데 발하고 있던 존재감이란

 

지금까지도 저의 기억에는 삼합을 두고 제가 DJ로부터 들었던 핀잔보다 그의 조용한 존재감이 더 선명하니까요.

 

"대체로 역사 속 이름 없는 이들은 여성이었다"고 했던 버지니아 울프의 말처럼

 

조명이 켜진 세상의 뒤켠에는 감춰진 누군가의 알 수 없는 희생이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그때 했더랬습니다.

 

김대중. 이희호.

 

두 사람의 이름을 따로 떼어놓고 생각하는 것은 가능할까

 

이희호는 그렇게 김대중의 버팀목이 됐습니다.

 

"더 강한 투쟁을 하시고급히 서두르지 마세요."

- 19721219일 편지 (자료 : < 옥중서신2 > 시대의창)

 

"좁고 험한 길, 참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의 수가 늘어나는 것에 더 희망이 보입니다"

- 1977521일 편지 (자료 : < 옥중서신2 > 시대의창)

 

결혼식 열흘 뒤 감옥에 끌려가서 갇혀버린 젊은 정치인 김대중

 

"그러기에 실망하지 않습니다우리의 뜻도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 1977617일 편지

 

그러나 "당신을 사랑하는 희호" 라고 마무리된 아내의 편지는 그보다 강인했습니다.

 

"나는 늘 아내에게 버림받을까 봐 나 자신의 정치적 지조를 바꿀 수 없었다"고 했던 그의 말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그날

 

삼합으로 허기를 채운 점심 후에 동교동 자택을 나설 때도

 

이미 오래전, 동교동 집 대문 앞에 걸어둔 '김대중.' 이희호. 나란한 부부의 문패는 그렇게 걸려있었습니다.

 

오늘의 앵커브리핑이었습니다. (2019.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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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1027. 서울 단성사.

 

무대 천정에서는 스르륵 하얀 천이 내려와 말로만 듣던 활동사진이 그 위에 펼쳐졌습니다.

 

장충단과 남대문, 뚝섬과 같은 도시 풍경은 물론 달리는 전차와 자동차의 움직임.

 

당시 10만의 관객을 모았다고 기록되는 한국영화 제1'의리적 구토'의 한 장면입니다.

 

의붓어머니에게 구박을 받고 자란 주인공이 훗날 복수한다는 내용

 

구토란 복수를 뜻하는 일본식 한자 표현이라는데

 

100년 전의 첫 영화는, 내용이야 그렇고 그랬지만 영화를 제작한 단성사 사장 박승필은 움직이는 세상의 경이로움을 하얀 천 위에 담아내고자 했습니다.

 

"칸의 선택은 봉준호만 빼고는 전부 틀렸다."

-르 피가로

 

"봉준호는 마침내 하나의 장르가 되었다."

- BBC

 

자신의 표현대로라면, '되게 이상한 영화'로 주목받은 감독.

 

그 역시 100년을 이야기했습니다.

 

"올해가 한국영화 100주년

제가 어느 날 갑자기

한국에서 혼자 영화를 만든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 많은 위대한 감독들이 있습니다."

- 봉준호 감독

 

그의 영화적 성취는 '의리적 구토' 이후 100년의 축적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겠지요.

 

또한같은 날. 노르웨이 오슬로의 '미래도서관'

(미래도서관 : 미공개 작품을 100년 뒤 출판하는 노르웨이 공공예술 프로젝트)

 

작가 한강은 자신뿐 아니라 자신의 아이도 존재하지 않을 100년 뒤의 세상을 상상했습니다.

 

100년 뒤에 인쇄하여 출간할 작품을 깊이 봉인하는 행사.

 

"나는 백년 뒤의 세계를

믿어야 한다

불확실한 가능성을

근거가 불충분한 희망을

믿어야만 한다"

- 한강 작가

 

작가는 미래의 세상에 대한 의구심을 굳이 감추려 하지 않았고 심지어는 종이책이 남아있을 것인가를 의심했지만

 

그래도 그는 애써 희망을 찾으려 했습니다.

 

두 사람이 그려낸

 

그래서 훗날의 사람들이 기억해줄 오늘의 세상은 어떤 것일까

 

상생과 공생이 아닌 '기생' 이 화두가 되어버린 세상.

 

"5·18사태는폭동" - 전두환

"북한 특수군의 게릴라전" - 지만원

 

피 흘려 사라진 사람들에 대한 모욕을 멈추지 않는 자들이 아직도 존재하는 세상

 

"당신들을 잃은 뒤

우리들의 시간은 저녁이 되었습니다."

- 한강 < 소년이 온다 >

 

100년이라는 시간 동안의 축적을 말하고 100년이라는 시간 뒤의 희망을 말하는 지금

 

그들이 한결같이 던지는 화두

우리가 사는 세상은 옳은가

 

 

오늘의 앵커브리핑이었습니다. (2019.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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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광역시 동서를 가로지르며 달리는 시내버스의 번호는 518번.

1998년부터 운행을 시작한 이 버스는 대구전자공고와 2·28 중앙공원 앞을 돌아나갑니다.

우연히 붙여진 번호였지만, '518번' 그 번호는 묘한 여운을 남깁니다.

이른바 '보수의 심장'이라 하는 대구 한복판을 달리는 '오일팔' 버스라니…

그러나 생각해보면 대구는 2·28 민주운동으로 기억되는 지역이지요.

2·28 민주 운동
1960년 대구 지역 고등학생들이 이승만 정권 부정부패에 항거하여 일으킨 민주화운동
(자료 : 2·28 민주운동 기념사업회)

1960년 독재에 항거하는 시민이 행진하던 거리에 '오일팔' 버스가 달리는 것은…

어찌 보면 '운명' 같아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며칠 전부터 광주광역시 시내에는 무등경기장과 옛 전남도청 자리를 지나가는 228번 버스가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10년 전부터 대구와 광주가 시도하고 있는 '달빛동맹' 입니다.

달빛동맹
2009년부터 시작된 '달구벌' 대구와 '빛고을' 광주의 도시 교류

달구벌과 빛고을은 5·18 버스의 짝꿍으로 2·28 버스를 만들어서 함께 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입맛도 말씨도 서로 다르지만 이들은 민주화를 열망하던 역사를 공유한 사람들이지요.

"당 소속 일부 국회의원들이 저지른 상식 이하의 망언…충심으로 사과드립니다…대구시민들 다수도 저와 같은 마음일 것입니다."
- 권영진, 대구시장

정치인들이 만들어 놓은 뿌리 깊은 분열과 왜곡에 반대하는 그들은 서로 공존하고자 애쓰고 있는 중입니다.

시간을 거슬러 지난 2000년, 부산의 거리 한복판…  

"동과 서를 하나로 합쳐서 광주에서 '콩'이면 부산에서도 '콩'이고 대구에서도 '콩'인 옳고 그름을 중심으로 해서"
- 영화 < 노무현과 바보들 > 2007년 4월 1일 제16대 총선 부산 거리유세 연설

그는 정치 1번지, 종로를 두고 모두가 말리는 지역으로 내려갔습니다.

'바보' 소리를 들어가며 그가 무너뜨리고자 했던 것은 작은 나라를 조각내듯 지배하는 견고한 지역 장벽이었습니다.

물론 그의 정치역정이 모두 성공한 것은 아니어서… 

대통령이 된 이후에는 "이게 다 노무현 때문" 이라는 유행어까지 등장했지요.

축구 대표팀이 져도, 비가와도, 연예인이 실수를 해도…

사람들은 그 유행어를 입에 달고 살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얻은 카타르시스는 과연 온당한 것이었을까…

어리석어 보였던 그의 시도들은 하나둘 조금씩 뿌리를 내려서 견고한 장벽은 조금씩 허물어지고 있으니…

달구벌을 달리는 '오일팔' 번 버스와 빛고을을 달리는 '이이팔' 번 버스…

오늘날 지역을 넘어 함께 가고자 하는 끊임없는 시도들…

따지고 보면 이것도 다는 아니어도 적어도 어느 정도는 노무현 때문이 아닐까…

오늘의 앵커브리핑이었습니다. (2019.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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