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의 앵커브리핑을 시작하겠습니다.

"감이 그렇게 떨어지면 어떻게 정치를 하나"

이른바 '친박'의 위세가 등등했던 시절.

그는 동료의원에게 전화를 걸어 그렇게 타박했습니다.

"세상을 무리하게 살면
되는 일이 아무것도 없잖아…
그럼, 그럼
우리가 도와드릴게…"
 - 최경환 전 자유한국당 의원

총선을 앞두고 있던 시기. 공천을 보장할 터이니 지역구를 옮기라는 권유 아닌 권유.

그들은 VIP의 의중을 들먹이며 위세를 과시하였으나…

정작 계파와 측근 정치로 인해 무너지는 성벽을 자신들만 깨닫지 못했으니…

분위기 파악…

즉 정치의 감을 잡지 못한 건 역설적이게도 그들 자신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4년이 다 돼서 다시 총선 준비로 분주한 시기.   

기자회견을 자처한 인물은 또 다른 '감'에 대한 주장을 펼쳐놨습니다.

"공관의 감은 공관병이 따야 한다" - 박찬주 전 육군대장

말에는 옹이와 가시가 박혀 있었습니다.

억울했던 모양이지요.

그는, 군대에 인권 의식이 무분별하게 유입되었다 했고 이제는 사라진 '삼청교육대'를 언급했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나무라는 것을 갑질이라 할 수 없으니 가족과도 같은 공관병에게 한 일은 갑질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저 이 모든 의혹은

군대를 무력화시키기 위한 불순 세력의 작품이라는데…

그 당당한 회견을 지켜본 시민들은 정작 감을 잡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를 되묻고 있었습니다.

"국회의원 되면 비서들 감 따러 가야 하나?
육군대장이 아니라 갑질대장
누가 감 떨어지는 소리를 내었어…

군인은 인권이 없어야 하나?
공관병이 집사인가?
 

또한 그를 "정말 귀한 분" 이라 칭하며 영입 의사를 밝힌 정당은 세상에 대한 감을 제대로 잡고 있는 것인가…

"감이 그렇게 떨어지면 어떻게 정치를 하나"

몇 년 전 때아닌 정치권 감 논란을 가져온 그들은 정작 시민들의 마음의 결을 놓쳐버렸기에 청산해야 하는 정치의 행태로 기록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또다시 돌아온 정치적 감의 계절…

자청해서 기자회견을 연 장군이 일갈한 "공관의 감은 공관병이 따야 한다"는 주장과 묘하게 겹쳐오면서 '감'의 계절이 시작됐음을 알리고 있는데…

하긴 두 감은 하필이면 장단음까지 같아서 평소 같으면 전혀 상관도 없을 두 단어가

장군님 한 마디에 적어도 정치적으로는 상관이 있게 되어버린…

오늘의 앵커브리핑이었습니다. (2019.11.4)


☞ 손석희의 앵커브리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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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은 그들에게 분신이자 연장된 손이자 흉기이자 친구였다"

- 김중혁/작가

 

지난 2007년 작가 김중혁은 요리사 4명을 만나서 바로 그 칼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요리사들의 손에는 하나같이 무수한 흉터가 있었는데 모두 칼과 벗하면서 생긴 흉터들이었지요.

 

어쩔 수 없이 찍히고, 방심해서 찔린 상흔들

 

칼은 수많은 흉터의 기억과 함께 그들의 요리 안으로 스며들었습니다.

 

무사가 휘두르면 피를 부르지만 요리사가 쥐면 향기로워지는 물건 ''

 

'칼을 잘 사용하는 사람' 이라는 의미의 '칼잡이'란 호칭은 과거에는 백정이나 망나니 같은 하층민을 의미했지만 오늘에 이르러서는 실력 있는 요리사나 의사 등을 일컫는 말이 됐습니다.

 

그 단어의 안에는 칼로 사람을 이롭게 한다는 자부심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한자는 다르지만 음이 같은 '' 이라는 글자 때문일까.

 

검사들 역시 스스로를 ''에 비유하여 표현하곤 하지요.

 

수사 실력이 출중한 특수통 검사를 '칼잡이'라고 부르고 강단 있는 수사로 이름난 선배 검사는 수사원칙을 칼에 비유해서 말하기도 했습니다.

 

'칼을 찌르되 비틀지 마라, 칼엔 눈이 없다. 잘못 쓰면 자신도 다친다' 까지

 

검사의 칼은 지위의 높고 낮음을 가리지 않으며 자신의 유불리를 가리지 않고 사용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또 강조한 말들일 것입니다.

 

장관 후보자를 향해서 그 칼을 빼든지 한 달, 바로 그 칼을 두고 논쟁이 벌어진 지도 한 달이 됐습니다.

 

검찰이 법무부 장관의 집을 압수수색 하면서 논란은 최고조에 달하고 있습니다.

 

과잉수사인가 아니면 정당한 절차인가, 이 형국에서 강자는 누구이고 약자는 누구인가

 

2019년 여름에서 가을을 관통하는 이 논쟁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렬합니다.

 

어찌 되었건 칼은 이제 다시 넣을 수 없게 됐고 칼을 겨눈 사람이건 겨눔을 당한 사람이건 그 칼에 다칠 수도 있게 되어버린 상황입니다.

 

공교롭게도 양쪽 모두 촛불의 광장에서 힘을 받았던 존재들이기 때문에 사뭇 비극이 되어버린 이 현실에 온 국민이 시선을 모으고 있는 가운데 칼의 방향은 아직 예측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진짜 칼잡이, 즉 요리의 달인들이 전하는 칼에 대한 생각은 어떠할까.

 

"방심하다 베면 기억에 남을 정도로 크게 다치는 법" - 안효주 / 요리사

"칼을 어떻게 대느냐에 따라 재료의 맛이 달라진다" - 윤정진 / 요리사

"요리에 따라 재료에 따라 칼을 놀리는 방법이 달라야" - 이연복 / 요리사

 

눈을 감고도 칼을 다룰 경지에 이르렀지만 그들은 늘 칼이 두렵고 어렵다고 했습니다.

 

누군가 휘두르면 험악해지지만 또 다른 누군가가 쥐면 향기로워지는 물건 ''

 

모두가 숨죽이며 바라보고 있는 그 칼은 세상을 험악하게 만들 것인가, 아니면 세상을 향기롭게 만들 것인가

 

오늘의 앵커브리핑이었습니다. (2019.9.25)


☞ 손석희의 앵커브리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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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에게는 열두 척의 배가 있습니다"

 

일본이 수출규제로 공격해온 이후 명량에서 일본의 적선을 맞이한 이순신의 전선 열두 척이 입길에 올랐습니다.

 

"전남의 주민들은 이순신 장군과 함께 물과 열두 척의 배로 나라를 지켜냈습니다."

 

누가 이순신이고, 누가 선조인가 논란이 일었고

 

"세월호 한 척으로 이겼다는 댓글"

- 자유한국당 최고위원

 

배는 열두 척이 아니라 그 배 한 척이라는, 막말이되 막말이 아니라 주장하는 조롱마저 등장했습니다.

 

논란은 분분하지만 다만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은 딱 한가지

 

그날 그 명량의 바다에서 이순신은 전선 단 열두 척을 거느리고 출정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이었지요.

 

그리고 그가 그 보잘것없는 배 열두 척으로 바다를 가득 메운 적선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던 필연적 이유는 바로 내부에 존재했다는 사실이었지요.

 

"조정을 기망한 것은 임금을 무시한 죄이고, 적을 놓아주지 않은 것은 나라를 저버린 죄"

- < 선조실록 > 1597313

 

"조정을 능멸하고, 임금을 기만했으며, 기동 출격 명령에 따르지 않은 죄"

 

바다를 지키던 그는, 느닷없이 포승줄에 묶여 도성으로 압송되었는데

 

"원균만 못하옵니다"

- < 선조실록 > 1597127

 

그 배경에는 임금의 두려움과 불신, 주변의 시샘과 잘못된 정보들

 

"원균은 매양 이순신이 공을 빼앗았다고 말하였습니다"

- < 선조실록 > 1597127

 

관계가 좋지 않았던 또 다른 장수와의 갈등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용서할 수는 없습니다"

- < 선조실록 > 1597127

 

그러니 이순신의 그 배 열두 척이란 상황을 만들어낸 것은 누구도 아닌, 바로 내부의 적.

 

"중죄에 처해야 합니다"

- < 선조실록 > 1597127

 

즉 끊임없이 분열하고 자신의 탐욕만을 앞세우던 당시의 위정자들이었다는 것

 

또한 그보다 중요한 것은 아마도

 

그 배 열두 척을 지켜낸 이들은 국난의 시기에 늘 그래왔듯이 그 뒤를 따르던 백성들의 작은 어선들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역사는 그렇게 말해주고 있지요

 

결국 왜란을 이겨냈던 것은 외부의 적 앞에서 분열했던 위정자들이 아니라 민초들이었다고 말입니다.

 

또한 늘 그랬듯 역사는 되풀이되는 것인가

 

가고 싶던 여행을 포기하고, 버릇처럼 손이 갔던 맥주 한 캔에도 손을 거두어들이는 애틋한 마음들은 그 열두 척의 배를 지켜낸 백성들의 마음과 닮아있습니다.

 

그러니 지금

 

누가 이순신인가는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오늘의 앵커브리핑이었습니다. (2019.7.18)



☞ 손석희의 앵커브리핑

[손석희의 앵커브리핑] '하나 둘 셋 스윙!'

Newsroom 2019. 7. 2. 11:21 Posted by applyingusa

뉴스룸의 앵커브리핑을 시작합니다.

 

넘어가고. 다시 넘어오고 그리고 다시 넘어가고.

 

똑같은 장면이 똑같은 장소에서 다시 이뤄지는 순간을 바라보면서 저 적당한 높이와 너비의 경계선은 이제는 되레 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하는 부질없는 생각까지 하게 됐던 어제였습니다.

 

그런 생각이란 것도 사실 1년이 조금 넘는 짧은 시간 동안에 그 경계선을 둘러싼 변화가 가져다준 것이겠지요.

 

분단의 경계선을 넘어서는 모습은 그렇게 비현실적인 느낌을 주기도 했지만사실 각자의 머릿속은 매우 현실적인 복잡한 셈법으로 가득하다는 걸 모르는 바도 아닙니다.

 

누군가에겐 당장 내년의 선거가 걸려 있을 것이고 남과 북의 사람들에게 핵과 평화란 그 자체로 명운이 걸린 문제이기도 하니까요.

 

그래서 누군가는 파격, 즉 격을 파하고, 누군가는 그 파격에 응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은 짐짓 한 발 뒤에 서 있던 것이고요.

 

그 세 사람을 보면서 역사의 진전이란 우연일까 필연일까를 다시 생각하게 한 하루

 

지난 5. 남북한이 맞닿은 비무장지대 안에 있는 도라 전망대에 그네가 한 대 생겼다고 합니다.

 

주황빛 기둥이 단단히 뿌리박은 이 그네는 조금 낯선 모양을 하고 있었지요.

 

서로 다른 이들이 호흡을 맞춰가며 타야 하는 3인용 그네였습니다.

 

누군가 한눈을 팔아서도 안 되고. 똑같이 발을 구르며 마음을 모아야만 그네는 중력을 거스르고 하늘로 올라갈 수 있다는데

 

당연히 쉬울 리는 없습니다.

 

그러나. 세 명이 눈과 마음을 모은 뒤 똑같이 발을 구르며 하늘로 올라가면

 

비로소 시원하게 눈에 담기는 한반도 북쪽의 풍경

 

비무장 지대북쪽 하늘을 향해 세워진 그 3인용 그네의 이름은

 

'하나 둘 셋 스윙!'이었습니다.

- 수퍼플렉스 / 자료 : 리얼디엠지 프로젝트

 

그리고 그네가 설치된 지 한 달 만에 공교롭게도 세 사람이 모여서 발 구르기를 시작한 셈이니.

 

이 그네가 설치된 것도 우연이었을까 필연이었을까라는 다소 부질없는 생각이 또 떠오른 하루

 

오늘의 앵커브리핑이었습니다(2019.6.17)


☞ 손석희의 앵커브리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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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1027. 서울 단성사.

 

무대 천정에서는 스르륵 하얀 천이 내려와 말로만 듣던 활동사진이 그 위에 펼쳐졌습니다.

 

장충단과 남대문, 뚝섬과 같은 도시 풍경은 물론 달리는 전차와 자동차의 움직임.

 

당시 10만의 관객을 모았다고 기록되는 한국영화 제1'의리적 구토'의 한 장면입니다.

 

의붓어머니에게 구박을 받고 자란 주인공이 훗날 복수한다는 내용

 

구토란 복수를 뜻하는 일본식 한자 표현이라는데

 

100년 전의 첫 영화는, 내용이야 그렇고 그랬지만 영화를 제작한 단성사 사장 박승필은 움직이는 세상의 경이로움을 하얀 천 위에 담아내고자 했습니다.

 

"칸의 선택은 봉준호만 빼고는 전부 틀렸다."

-르 피가로

 

"봉준호는 마침내 하나의 장르가 되었다."

- BBC

 

자신의 표현대로라면, '되게 이상한 영화'로 주목받은 감독.

 

그 역시 100년을 이야기했습니다.

 

"올해가 한국영화 100주년

제가 어느 날 갑자기

한국에서 혼자 영화를 만든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 많은 위대한 감독들이 있습니다."

- 봉준호 감독

 

그의 영화적 성취는 '의리적 구토' 이후 100년의 축적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겠지요.

 

또한같은 날. 노르웨이 오슬로의 '미래도서관'

(미래도서관 : 미공개 작품을 100년 뒤 출판하는 노르웨이 공공예술 프로젝트)

 

작가 한강은 자신뿐 아니라 자신의 아이도 존재하지 않을 100년 뒤의 세상을 상상했습니다.

 

100년 뒤에 인쇄하여 출간할 작품을 깊이 봉인하는 행사.

 

"나는 백년 뒤의 세계를

믿어야 한다

불확실한 가능성을

근거가 불충분한 희망을

믿어야만 한다"

- 한강 작가

 

작가는 미래의 세상에 대한 의구심을 굳이 감추려 하지 않았고 심지어는 종이책이 남아있을 것인가를 의심했지만

 

그래도 그는 애써 희망을 찾으려 했습니다.

 

두 사람이 그려낸

 

그래서 훗날의 사람들이 기억해줄 오늘의 세상은 어떤 것일까

 

상생과 공생이 아닌 '기생' 이 화두가 되어버린 세상.

 

"5·18사태는폭동" - 전두환

"북한 특수군의 게릴라전" - 지만원

 

피 흘려 사라진 사람들에 대한 모욕을 멈추지 않는 자들이 아직도 존재하는 세상

 

"당신들을 잃은 뒤

우리들의 시간은 저녁이 되었습니다."

- 한강 < 소년이 온다 >

 

100년이라는 시간 동안의 축적을 말하고 100년이라는 시간 뒤의 희망을 말하는 지금

 

그들이 한결같이 던지는 화두

우리가 사는 세상은 옳은가

 

 

오늘의 앵커브리핑이었습니다. (2019.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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