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의 앵커브리핑을 시작하겠습니다.

 

"나는 지금 꿈의 나라에 와 있네"

 

그는 19세기, 메이지 시대의 일본을 마음 깊이 사랑했습니다.

 

작가 '라프카디오 헌'

(1850~1904)

 

아일랜드계 영국인이었던 그는 일본에 귀화해 사무라이의 딸과 혼인하였고 이름마저 고이즈미 야쿠모로 바꿉니다.

 

도쿄제국대학 교수로 임명되서 영문학을 강의한 푸른 눈의 일본인.

 

꿈의 나라와도 같았던 일본몽이 깨어진 것은 순식간이었습니다.

 

대학에서 갑자기 임금을 절반으로 줄이겠다 통보했고 갈등 끝에 그는 해고통지를 받게 되었는데

 

그것은 유학하고 돌아온 '일본인' 선생을 고용해야 한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동포에게서 배울 수 있다면 한시라도 빨리 외국인 교사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싶다"

- 다나구치 지로, 세키카와 나쓰오 < 도련님의 시대 >

 

일본은 푸른 눈의 일본인에게 영문학을 배우는 한편으로는 유망했던 작가 나쓰메 소세키를 영국에 국비 유학 시켰고

 

그가 유학을 마치고 돌아오자 이젠 쓸모가 없어진 서양인을 내쳐버린 것입니다.

 

그것은 일본의 치밀함을 보여주는 동시에

 

외부를 향해 열린 듯 닫혀 있는 그들의 습성까지 한꺼번에 드러내 보이는 사례로 기록됩니다.

 

라프카디오 헌, 아니 고이즈미 야쿠모는 일본을 지극히 사랑했으나

 

일본과 영국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다만 쓸쓸함으로 기억될 뿐이지요.

 

"사실은 영국 작가 책입니다!"

 

그가 사망한 지 110여 년이 지나서 한국의 어느 출판사는 그가 일본인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하긴 일본 제품 불매운동이 한창인 상황이니 출판사 입장에선 곤혹스러울 만도 했습니다.

 

"일본 환상문학의 전설적 명저"

"사실은 영국 작가 책입니다!"

 

그러나 "일본의 환상 문학"을 강조했던 선전 문구가 하루아침에 "영국 작가의 책"으로 바뀌어버린 웃지 못할 아이러니

 

마지막 순간까지 일본인으로 살아가고자 했던 작가는 쓰임이 다한 순간 일본에서 내쳐진 동시에 한참의 세월이 지난 후 한국에서조차 일본인임을 부정당해야 하는 신세가 된 것입니다.

 

"나는 지금 꿈의 나라에 와 있네"

- 라프가디오 헌 (고이즈미 야쿠모)

 

작가 라프카디오 헌

 

그는 일본몽을 꾸며 그곳에 뿌리를 내리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꿈이 일장춘몽이 된 이유는 일본인의 특징이라고 그 자신들도 인정하는 이중적 속내

 

다테마에 - 겉마음

혼네 - 속마음

 

, 혼네를 읽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100년이 훨씬 넘은 지금까지도

 

그리고 훗날까지도 일깨워야 할 교훈이라면 교훈이랄까

 

오늘의 앵커브리핑이었습니다. (2019.8.7.)


☞ 손석희의 앵커브리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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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결한 사람들이 사는 보석 같은 나라"
- 펄 벅 미국 작가

미국의 작가 펄 벅은 한국을 유난히 사랑했습니다.

우리나라의 구한말과 해방 시기를 배경으로 한 장편소설까지 써냈을 정도였습니다.

그의 작품 '살아있는 갈대'에서 '갈대'란, 등장인물의 별칭이자 가장 중요한 상징성을 담은 주제어였습니다.

즉 갈대란 불의와 폭력 앞에서도 꺾이지 않고 꿋꿋하게 저항했던…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 김수영 < 풀 >

마치 시인 김수영이 이야기한 그 풀과도 같은 한국인의 정신을 상징하고 있었습니다. 

일본의 침략이 본격화되었던 시기에 영국의 기자 매켄지가 바라본 한국 역시 참담하고 비극적이었으나 아름다웠습니다.

그는 1907년 산속 깊은 곳에 숨은 의병들의 본거지를 찾아간 순간을 잊을 수 없다고 말했지요.

"이기기 힘들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유민으로 싸우다 죽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 프레더릭 매켄지 < 한국의 독립운동 >

청년의 눈빛은 빛났고, 입가에는 미소가 감돌았다 합니다.

매켄지가 세상에 알린 조선인의 모습은 그렇게 초라했지만 당당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한국의 의병이란 파리 떼와 같다. 아무리 잡아도 계속해서 붙는…"
- 도쿠토미 소호 일본 역사학자

일본인의 눈에 한국의 의병이란…

밟아도 밟아도 일어나니 마치 파리 떼와도 같이 지긋지긋하였을 것입니다.

이른바 힘이 약한 나라가 강대국에 병합되었고 왕과 대신들이 나서서 국권을 넘겨주었는데 백성들은 왜 끊임없이 저항하는가…

아마도 그들은 그때나, 그리고 지금이나, 한국인의 기질을 도통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지방 공항에서 시작된 일본행 비행 편 축소가 결국 인천공항까지 옮겨왔다고 하지요.

누가 부추기거나 강요한 적이 없지만…

결과는 이렇게 나타나고 있는 중입니다.

짐짓 아무 일 아니란 듯 보고 있던 일본의 매체들도 이쯤에 와선 신경을 곤두세우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오늘(30일) 전해드렸습니다.

텅 빈 일본 의류매장의 주차장과 편의점의 일본 맥주 코너, 그리고 일본행 비행기…

여의도의 요란한 설전과는 상관없는 '살아있는 갈대'들의 소리 없는…

그러나 묵직한 전쟁…

오늘의 앵커브리핑이었습니다. (2019.7.30)


☞ 손석희의 앵커브리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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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산(독도)과 무릉(울릉도)은 풍일(날씨) 청명하면 서로 바라볼 수 있다"
- 세종실록 지리지

1454년에 완성된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날이 좋으면 맨눈으로 동쪽의 섬들을 바라볼 수 있다 했습니다.

우리 국토 최동단에 위치한 울릉도와 독도.

마치 형님과 아우같이 늘어선 두 섬은 하늘과 파도가 맑으면 서로 그 형체를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 보인다는 이야기였지요.

억지 반론도 존재합니다.

일본 학계에서 독도 연구에 정통한 것으로 알려진 가와카미 겐조는 자신의 저서에서 "독도를 볼 수 있는 거리는
고작 59km 이내"라고 했는데.

그 말인즉슨 87.4km 떨어진 울릉도와 독도가 서로 보일 리가 없으니 세종실록지리지의 기록 또한 허구라는 주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지난 2014년 11월 5일 우산과 무릉은 풍일 청명하면 서로 바라볼 수 있다는 기록이 사진으로 증명되었습니다.

사진가의 앵글은 울릉에서 꼬박 3년을 기다리며 그 순간을 담아냈고,

붉은 아침 해가 뜨는 가장 한가운데… 

우리의 영토 독도는 또렷이 등장한 것입니다.

"일본 영토에서 이러한 행위를 한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오늘 그들은 또다시 억지 주장을 꺼냈습니다.

우리 군이 우리의 영공을 침범한 러시아 군용기를 향해 경고사격을 한 것에 대한 반응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동해의 외롭지 않은 섬 독도는 한·일 간 무역 분쟁의 와중에 또다시 그들의 무례한 입길에 오르내리게 되었지요.

물론 집요하고, 매우 끈질긴. 그들의 주장에 일일이 맞대응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르나…

오늘은 울릉도에서 직접 바라본 해 뜨는 독도의 이 모습과 함께 지난해 일본의 영토담당상이 했다는 다소 흥미로운 발언을 소개해드립니다.  

"저쪽 방향에 일본 고유의 영토가 있다는 걸 확신했다. 물론 독도가 보이진 않았지만…."

독도와 제일 가까운 일본 섬은 오키섬…

그 거리는 157.5 km…

울릉도보다 두 배쯤 멀리 있으니 보고 싶어도 못 봅니다.

오늘의 앵커브리핑이었습니다.(2019.7.23)

☞ 손석희의 앵커브리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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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에게는 열두 척의 배가 있습니다"

 

일본이 수출규제로 공격해온 이후 명량에서 일본의 적선을 맞이한 이순신의 전선 열두 척이 입길에 올랐습니다.

 

"전남의 주민들은 이순신 장군과 함께 물과 열두 척의 배로 나라를 지켜냈습니다."

 

누가 이순신이고, 누가 선조인가 논란이 일었고

 

"세월호 한 척으로 이겼다는 댓글"

- 자유한국당 최고위원

 

배는 열두 척이 아니라 그 배 한 척이라는, 막말이되 막말이 아니라 주장하는 조롱마저 등장했습니다.

 

논란은 분분하지만 다만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은 딱 한가지

 

그날 그 명량의 바다에서 이순신은 전선 단 열두 척을 거느리고 출정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이었지요.

 

그리고 그가 그 보잘것없는 배 열두 척으로 바다를 가득 메운 적선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던 필연적 이유는 바로 내부에 존재했다는 사실이었지요.

 

"조정을 기망한 것은 임금을 무시한 죄이고, 적을 놓아주지 않은 것은 나라를 저버린 죄"

- < 선조실록 > 1597313

 

"조정을 능멸하고, 임금을 기만했으며, 기동 출격 명령에 따르지 않은 죄"

 

바다를 지키던 그는, 느닷없이 포승줄에 묶여 도성으로 압송되었는데

 

"원균만 못하옵니다"

- < 선조실록 > 1597127

 

그 배경에는 임금의 두려움과 불신, 주변의 시샘과 잘못된 정보들

 

"원균은 매양 이순신이 공을 빼앗았다고 말하였습니다"

- < 선조실록 > 1597127

 

관계가 좋지 않았던 또 다른 장수와의 갈등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용서할 수는 없습니다"

- < 선조실록 > 1597127

 

그러니 이순신의 그 배 열두 척이란 상황을 만들어낸 것은 누구도 아닌, 바로 내부의 적.

 

"중죄에 처해야 합니다"

- < 선조실록 > 1597127

 

즉 끊임없이 분열하고 자신의 탐욕만을 앞세우던 당시의 위정자들이었다는 것

 

또한 그보다 중요한 것은 아마도

 

그 배 열두 척을 지켜낸 이들은 국난의 시기에 늘 그래왔듯이 그 뒤를 따르던 백성들의 작은 어선들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역사는 그렇게 말해주고 있지요

 

결국 왜란을 이겨냈던 것은 외부의 적 앞에서 분열했던 위정자들이 아니라 민초들이었다고 말입니다.

 

또한 늘 그랬듯 역사는 되풀이되는 것인가

 

가고 싶던 여행을 포기하고, 버릇처럼 손이 갔던 맥주 한 캔에도 손을 거두어들이는 애틋한 마음들은 그 열두 척의 배를 지켜낸 백성들의 마음과 닮아있습니다.

 

그러니 지금

 

누가 이순신인가는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오늘의 앵커브리핑이었습니다. (2019.7.18)



☞ 손석희의 앵커브리핑

[손석희의 앵커브리핑] '차라리 뺑뺑이'

Newsroom 2019. 7. 13. 12:20 Posted by applyingusa

뉴스룸의 앵커브리핑을 시작하겠습니다.

 

태국의 스물한 살 청년들은 매년 4월이 되면 한자리에 모여서 울고 웃습니다.

 

그들은 항아리같이 생긴 동그란 통에 손을 넣고 제비를 뽑는데

 

'입대'

 

빨간색을 뽑은 사람의 표정은 말로 표현하기조차 어렵게 어두워지고,

 

'면제'

 

검은색을 뽑은 사람은 만세를 부르거나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등 기쁨을 감추지 못합니다.

 

태국의 추첨 징병제 현장의 모습입니다.

 

한해 필요한 군인의 숫자를 정해놓고 지원자를 모집한 뒤에 부족할 경우에는 전국의 만 21세 남성에게 소집령을 내려 제비뽑기를 하는 방식입니다.

 

승려가 되어버린 사람도 한국에서 활동하는 유명 아이돌 멤버도 피할 수 없는 절차라고 하는데

 

이것도 어찌 보면 제가 며칠 전 앵커브리핑에서 소개해드린 지극히 공정한 이른바 '뺑뺑이'의 방식을 따르고 있으니

 

희비는 엇갈리겠지만 문제제기를 하는 사람들은 없다고 하는군요.

 

우리의 경우는 어떤가

 

누구나 다 가야 하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누구나 다 예외 없이 가지는 않는 곳

 

국민의 4대 의무이니 특별한 사유가 없으면 당연히 가야 하지만 어떤 이들은 그 특별한 사유를 어떻게든 만들어내서 끝내는 가지 않는 곳

 

그래서 누구는 몸무게를 늘리거나 줄이고, 누구는 영 생소한 질환을 이유를 들고

 

그 외에도 셀 수 없는 여러 가지 특별한 사유를 만들어 내는 이른바 '신의 아들이 태어나는 곳', 군대

 

17년을 기다린 끝에 다시 입국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될지로 모를 이제는 중년이 되어버린 남자가 있습니다.

 

17년이라는 시간은 대중과의 약속을 어긴 그 스스로가 불러들인 재앙이기도 했습니다.

 

법적으로는 그때부터도 그를 막을 이유가 없었다지만 법으로만은 설명할 수 없는 이유를 그도 모를 리 없을 터

 

이미 그는 전성기를 잃어버린 나이인 데다가 특정인에게만 지나치게 가혹하다는 동정론도 있긴 있지만 아직도 여론은 싸늘함이 더 큽니다.

 

어찌 됐든 그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그가 다시 돌아온다면 그날의 공항 풍경은 어떠할까

 

적어도 매년 4월 스물한 살이 된 청년들이 항아리에 손을 넣어 제비를 뽑고 종이 색깔에 따라서 울고 웃는 풍경보다는 확실히 덜 아름다울 것 같다는

 

오늘의 앵커브리핑이었습니다. (2019.7.11)


☞ 손석희의 앵커브리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