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청자 여러분 뉴스룸의 앵커브리핑을 시작하겠습니다.

 

947회째를 맞는 올해 마지막 앵커브리핑은 또한 저의 마지막 브리핑이기도 합니다.

 

'여윈 바늘 끝이 떨고있는한 바늘이 가리키는 방향을 믿어도 좋습니다.'

- < 떨리는 지남철 > 글씨와 그림 : 신영복, 자료 : 돌베개

 

그는 떨리는 것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동그란 나침반 안에 들어 있는 지남철, 그 자석의 끝은 끊임없이 흔들리는데

 

그 흔들림이야말로 가장 정확한 방향을 찾아내기 위한 고뇌의 몸짓이라는 의미.

 

선배 세대가 남긴 살아감에 대한 통찰은 그러했습니다.

 

"정지 상태에 머물러 있으면 부패와 타락에 이르지만

끊임없이 움직인다면 어쩌면 영원히 지속될 수 있지 않을까"

- 올가 토카르추크 <방랑자들 >

 

폴란드 작가 올가 토카르추크 역시 끊임없이 움직이며 방황하는 존재들을 작품에 담았습니다.

 

"움직여. 계속 가. 떠나는 자에게 축복이 있으리니"

- 올가 토카르추크 <방랑자들 >

 

삶이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불안정한 것이니 흔들리고, 방황하며 실패할지라도 그는 계속 움직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또한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사임 과정을 담은 영화 < 두 교황 >은 그 움직임의 생존적인 의미를 담아냅니다.

 

나이 든 교황이 건강 때문에 스마트 워치를 차고 생활하는데, 그가 한동안 움직이지 않을 경우에 어김없이 알람이 울립니다.

 

"멈추지 마세요. 계속 움직이세요"

- 영화 '두 교황'

 

그래야 비로소 살아있는 것이라는 그 냉정한 경고는 가톨릭의 수장인 교황에게도 또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공히 해당되는 말이 아닐까

 

수없이 올바른 목표점을 향해서 끊임없이 떨고 있는 그 나침반처럼 두려운 듯 떨리며 움직여온 우리의 2019.

 

그리고 몇 시간 뒤 만나게 될 새로운 2020년 역시, 멈추지 않는 끊임없는 움직임으로 나아가시기를 바라며

 

그 간의 앵커브리핑에서 가장 많은 분들의 사랑을 받았던 아일랜드 켈트족의 기도문을 보내드리는 것으로 뉴스룸의 < 앵커브리핑 >을 모두 마치겠습니다.

 

"바람은 언제나 당신의 등 뒤에서 불고,

당신의 얼굴에는 항상 따사로운 햇살이 비추길" (2019.12.31)


☞ 손석희의 앵커브리핑

뉴스룸의 앵커브리핑을 시작하겠습니다.

 

13년 전의 오늘(26) 모든 신문 1면의 주인공은 바로 이 사람들.

 

한국 최초의 우주인 후보가 정해졌다는 소식에 모두가 가졌던 첫 번째 생각은 아마 '우리도(언젠가)' 였을 것입니다.

 

물론 결말은 해피엔딩으로 남지 못했지요.

 

몇 년 지나지 않아서 희망은 가라앉았고 우주는 다시 우리 삶으로부터 멀어졌습니다.

 

골든 레코드

우주탐사선 보이저호에 담은 지구를 알리는 음반

 

그보다 더 오래전인 1977년 천문학자 칼 세이건은 구리로 만든 LP판 모양의 '골든 레코드'를 보이저 1호와 2호에 실어서 우주로 보냈습니다.

 

"안녕하세요? 지구인입니다"

 

이 골든 레코드는 서로 다른 쉰다섯 개의 언어로 녹음한 인사말과 인류가 사랑한 음악과 사진을 품은 채로 지금 이 시간에도 우주를 유영하고 있을 터인데, 칼 세이건의 그 소망처럼 우리는 언젠가 새로운 우주를 만날 수 있을까

 

"그들은 분명히 알 것이다. 우리가 희망과 인내를그리고 우주와 접촉하고자 하는 뚜렷한 열의를 지닌 종이었다는 사실을"

- 칼 세이건 < 지구의 속삭임 >

 

"하지만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같은 우주라는 개념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 김초엽 <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

 

과학을 전공한 SF작가 김초엽은 작품을 통해서 질문을 던졌습니다.

 

바로 곁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말조차 귀 기울이지 않는 반면에, 또다시 새로운 누군가와 소통하기 위해서 수많은 비용과 노력을 낭비하고 있는 것은 아이러니다, 하는 것이죠.

 

"아무리 우주를 개척하고 인류의 외연을 확장하더라도

우리는 점점 더 우주에 존재하는 외로움의 총합을 늘려갈 뿐인 게 아닌가"

- 김초엽 <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 (일러스트 : 이규태, 자료 : 동아시아)

 

작가는 어느 시대와 공간을 살아가든 서로를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우주를 개척하고 인류의 외연을 확장하더라도 우리는 점점 더 우주에 존재하는 외로움의 총합을 늘려갈 뿐"이라고 말합니다.

 

"안녕하세요"

 

한국어로도 녹음이 되어 있는 보이저호의 실린 지구인의 인사말.

 

그러나 천문학자들에 따르면 그 메시지가 실제로 외계생명체에 닿을 확률은 매우 희박합니다.

 

그것은 오히려, 오늘을 사는 우리, 지구인 스스로를 향해 존재해야 한다는 의미였습니다.

 

"이 메시지는 지구인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 문홍규/한국천문연구원 책임연구원

 

끊임없이 새로운 영역을 꿈꾸고 소망하지만, 우리가 우주를 향하여 어차피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는 것'이라면

 

먼저 나의 옆 사람에게 당도하라는

 

그것이 없다면 우리의 삶은 얼마나 피폐한 것인가

 

13년 전의 떠들썩함이 이만큼이나 허무한 것처럼 말입니다.

 

오늘의 앵커브리핑이었습니다. (2019.12.26)


☞ 손석희의 앵커브리핑

뉴스룸의 앵커브리핑을 시작하겠습니다.

대규모의 총격전이 벌어진 그곳은 서울 시내 한복판이었습니다.

남북한 비밀 요원들은 핵무기를 뺏고 빼앗기며 목숨을 건 추격전에 나섭니다.

드라마 < 아이리스 > 의 결정적인 장면이었지요.

촬영된 곳은 광화문광장 한복판이었습니다.

드라마 때문에 광장을 통제하다니…

더구나 2009년 그 당시는 광장에서 시위를 하는 것조차 좀처럼 허용되지 않던 시기였습니다.

"아이리스는 되는데 우리는 왜 안 되나" 시민들은 시위는 막으면서 드라마에 광장을 열어준 당국의 이중 잣대에 문제를 제기했던 기억입니다.

그때를 생각한다면 오늘의 광장은 그야말로 열린 공간 그 자체입니다.

누군가의 표현대로, 우리의 민주주의는 광장이라는 측면에서'만' 본다면 가히 '최고 수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지요.

광화문 물론, 검찰청과 여의도, 그리고 청와대 앞까지 개방된 광장의 풍경은 달라진 세상을 실감하게 만듭니다.

치고 빠지는 수법으로 텐트를 설치해가면서 주목을 끌었던 이들을 시작으로 해서 주말의 대한문 인근은 차도까지 점거해가며 교통체증을 유발하는 시위대의 세상입니다.

아스팔트 거리 한복판에선 밤을 지새우는 이른바 구국통성기도회가 열리고 태극기와 노숙 텐트는 물론이고 외국 악기인 부부젤라까지 동원돼서 인근 주민들의 일상을 방해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광장이란 누구에게나 열린 장소라고 하는데…

민주사회 시민에게 '광장이란 대체 무엇인가'라는 매우 근본적인 질문이 다시 등장하게 된 것이지요.

1년 전에 세상을 떠난 작가 최인훈.
 

인간은 광장에 나서지 않고는 살지 못한다.
표범의 가죽으로 만든 징이 울리는
원시인의 광장으로부터…
현대적 산업 구조의 미궁의 이르기까지
시대와 공간을 달리하는 수많은 광장이 있다

- 최인훈 < 광장 >

그의 일생을 지배한 화두는 바로 '광장'이었습니다.
 

광장이 죽은 곳. 이게 남한 아닙니까?

- 최인훈 < 광장>

그의 작품 속 주인공 이명준은 남과 북 어디에서도 끝내 자신의 '광장'을 찾지 못하고 절망했습니다.

그리고 2019년 겨울의 광장.

모두에게 열려 있으나, 그 열려 있음을 빌미로 해서 점유되어버린 무법의 공간.
 

다만 나에게 한 뼘의 광장과 한 마리의 벗을 달라

- 최인훈 < 광장 >

시민들의 공간을 점거한 그들이 목소리를 높이는 사이에 소설 < 광장 > 의 이명준은 오늘도 어디에선가 진정한 민주주의의 광장을 찾아 헤매고 있을까…

오늘의 앵커브리핑이었습니다. (2019.11.26)


☞ 손석희의 앵커브리핑

뉴스룸의 앵커브리핑을 시작하겠습니다.

"감이 그렇게 떨어지면 어떻게 정치를 하나"

이른바 '친박'의 위세가 등등했던 시절.

그는 동료의원에게 전화를 걸어 그렇게 타박했습니다.

"세상을 무리하게 살면
되는 일이 아무것도 없잖아…
그럼, 그럼
우리가 도와드릴게…"
 - 최경환 전 자유한국당 의원

총선을 앞두고 있던 시기. 공천을 보장할 터이니 지역구를 옮기라는 권유 아닌 권유.

그들은 VIP의 의중을 들먹이며 위세를 과시하였으나…

정작 계파와 측근 정치로 인해 무너지는 성벽을 자신들만 깨닫지 못했으니…

분위기 파악…

즉 정치의 감을 잡지 못한 건 역설적이게도 그들 자신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4년이 다 돼서 다시 총선 준비로 분주한 시기.   

기자회견을 자처한 인물은 또 다른 '감'에 대한 주장을 펼쳐놨습니다.

"공관의 감은 공관병이 따야 한다" - 박찬주 전 육군대장

말에는 옹이와 가시가 박혀 있었습니다.

억울했던 모양이지요.

그는, 군대에 인권 의식이 무분별하게 유입되었다 했고 이제는 사라진 '삼청교육대'를 언급했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나무라는 것을 갑질이라 할 수 없으니 가족과도 같은 공관병에게 한 일은 갑질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저 이 모든 의혹은

군대를 무력화시키기 위한 불순 세력의 작품이라는데…

그 당당한 회견을 지켜본 시민들은 정작 감을 잡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를 되묻고 있었습니다.

"국회의원 되면 비서들 감 따러 가야 하나?
육군대장이 아니라 갑질대장
누가 감 떨어지는 소리를 내었어…

군인은 인권이 없어야 하나?
공관병이 집사인가?
 

또한 그를 "정말 귀한 분" 이라 칭하며 영입 의사를 밝힌 정당은 세상에 대한 감을 제대로 잡고 있는 것인가…

"감이 그렇게 떨어지면 어떻게 정치를 하나"

몇 년 전 때아닌 정치권 감 논란을 가져온 그들은 정작 시민들의 마음의 결을 놓쳐버렸기에 청산해야 하는 정치의 행태로 기록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또다시 돌아온 정치적 감의 계절…

자청해서 기자회견을 연 장군이 일갈한 "공관의 감은 공관병이 따야 한다"는 주장과 묘하게 겹쳐오면서 '감'의 계절이 시작됐음을 알리고 있는데…

하긴 두 감은 하필이면 장단음까지 같아서 평소 같으면 전혀 상관도 없을 두 단어가

장군님 한 마디에 적어도 정치적으로는 상관이 있게 되어버린…

오늘의 앵커브리핑이었습니다. (2019.11.4)


☞ 손석희의 앵커브리핑

뉴스룸의 앵커브리핑을 시작하겠습니다.

 

모든 물체를 집어삼켜 빛조차 빠져나올 수 없는 어둠 '블랙홀'은 인류가 닿을 수 없는 미지의 영역이기에, 더욱 두려운 존재입니다.

 

"블랙홀은 그다지 감지 않다"

 

그러나 블랙홀을 연구해온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은 블랙홀이 그 이름과는 달리 "그다지 검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호킹복사

블랙홀도 에너지를 갖는 입자를 방출하며 결국에는 증발해 없어질 수 있다는 이론

 

그는 블랙홀이 에너지를 빨아들일 뿐만 아니라, 뱉어내기도 한다는 것을 발견했고 설사 블랙홀에 빠진다 해도 분명히 탈출할 방법이 있다고 설명했지요.

 

물론 이것은 우리에게 너무나 멀고 먼 우주 저편의 이야기

 

오늘(3)의 세상이 두 달 가까운 시간 동안 빨려 들어가고 있는 블랙홀은 어찌할 것인가.

 

지난 주말 서초동의 촛불집회에 이어서 오늘 광화문은 그 반대편의 목소리로 뒤덮였습니다.

 

국회 대정부질문은 물론이고 국정감사까지

 

그리고 주말과 공휴일을 메우고 있는 외침

 

한 사람을 둘러싼 이 이슈가 모든 다른 이슈들를 덮어버린 이른바 '블랙홀 정국'은 이렇게 모든 것을 빨아들이고 있는데

 

이 블랙홀의 끝이란 있는 것일까

 

"당신이 블랙홀에 있다고 생각한다면, 포기하지 말라. 탈출구는 있다."

- 스티븐 호킹

 

스티븐 호킹은, 절망을 몸으로 알고 있었던 인물이기에 탈출의 방법 또한 체험적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루게릭병을 앓고 있던 그는 겨우 움직일 수 있는 두 손가락만을 이용해서 대화를 나누고 강연을 했는데, 그 두 손가락마저 움직일 수 없게 되었을 때도 안면 근육을 이용해서 컴퓨터를 작동시키며 연구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내 생애 가장 큰 업적은 살아있는 것"

- 스티븐 호킹

 

모두가 절망으로 여긴 상황 속에서도 그는 기회를 찾아내려 했으니, 호킹 박사에게 있어 블랙홀이란 과학의 영역에서도 삶의 영역에서도 더 이상 칠흑 같은 '감옥'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원했든, 원치 않았든 빠져버린 오늘의 블랙홀 역시 어쩌면 마찬가지가 아닐까.

 

한없이 어둡고 답답하지만 그 어둠의 심연을 또렷이 바라본다면 탈출구란 어딘가 분명 존재하고

 

"블랙홀은 그다지 감지 않다 분명히 탈출구는 있다"

 

스티븐 호킹이 남긴 그 말처럼 블랙홀이란 그다지 검지 않을 터이니 말입니다.

 

오늘의 앵커브리핑이었습니다. (2019.10.3)


☞ 손석희의 앵커브리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