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의 앵커브리핑을 시작하겠습니다.

 

학식이 뛰어난 어느 학자는 낯선 땅으로 여행을 떠납니다.

 

그는 기이한 일을 겪으며 자신의 그림자를 잃어버리게 되었는데

 

"그림자를 잃어버렸잖아! 이것 참 신경 쓰이는군"

- 안데르센 < 그림자 >

 

주인은 이내 자신의 그림자를 잊었지만

 

문제는 혼자서 긴 여행을 마친 그림자가 다시 돌아온 이후부터 시작됐습니다.

 

", 당신이 나를 알아봐 주기를 바랐는데내가 다시 돌아오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 거군요."

- 안데르센 < 그림자 >

 

사람보다 더 사람 같은 능력과 권세를 과시하던 그림자는 아예 그림자가 아닌 주인이 되고자 했고

 

"내 궁전에 살면서모두가 자네를 그림자라고 불러도 가만히 있어야 해자네가 인간이라는 사실도 절대 겁 없이 말해서는 안 돼"

- 안데르센 < 그림자 >

 

급기야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는 과거의 주인 즉, 학자를 살해하고 만다는 비극적인 결말

 

안데르센의 동화 같지 않은 동화 '그림자'의 줄거리였습니다.

 

일본의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

 

3년 전에 안데르센 문학상을 받게 된 그는 수상소감을 이야기하면서 이 '그림자'라는 작품을 끄집어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그림자가 있듯, 사회와 국가에도 모두 그들만의 어두운, 피하고만 싶은 '그림자'가 존재합니다."

- 무라카미 하루키

 

'모든 사람에게 그림자가 있듯, 사회와 국가에도 모두 그들만의 어두운, 피하고만 싶은 '그림자'가 존재한다'는 것

 

"밝고 빛이 나는 부분이 있다면, 그 이면에는 반드시 어두운 부분이 있습니다."

- 무라카미 하루키

 

'밝고 빛이 나는 부분이 있다면 그 이면에는 반드시 어두운 부분'이 존재하며,

 

"그림자를 수반하지 않은 빛은 진정한 빛이 아닙니다"

- 무라카미 하루키

 

'그림자를 수반하지 않은 빛은 진정한 빛이 아님을' 강조했지요.

 

"아무리 역사를 다시 써서 우리에 맞게 수정하려 해도 종국에는 우리 스스로 상처 입고 가슴 아파하는 일이 생길 것입니다."

- 무라카미 하루키

 

그것은 작가 자신은 물론이고 수많은 독자들을 향한 조언이자 국가와 권력을 향한 충고이기도 했습니다.

 

오늘(15)은 우리에게는 광복일이자 누군가에게는 종전일 혹은 패전일로 기억됩니다.

 

그들은 전쟁과 식민지배라는 자신들의 그림자를 부정하고 싶어 하지만

 

부정하면 할수록 그림자는 더욱 커지며 자신들의 빛도 기운을 잃는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 그들의 수장은 또다시 자신의 그림자를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아니, 오히려 대체 언제까지 그 그림자를 돌아봐야 하느냐고 외치고 있지요.

 

안데르센의 작품 '그림자'의 주인도 어둠으로 가득한 자신의 그림자를 지워버린 채 잊고서 살아가고자 했습니다.

 

영원히 지워버리고 싶었을 것이나

 

저 혼자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난 그 어두운 그림자는 어느 순간 주인에게 돌아와 문을 두드리며 속삭입니다.

 

"내가 돌아왔다"

 

오늘의 앵커브리핑이었습니다. (2019.8.15)


☞ 손석희의 앵커브리핑

뉴스룸의 앵커브리핑을 시작하겠습니다. 1960년대 서울 명동 골목에는 일본 잡지 파는 가게가 줄지어 있었습니다. 각종 여성 잡지들이 열을 맞춰 놓여있고 사람들은 들척들척 들었다 놨다 하다가… 단골 구독하던 잡지를 하나 찾아내 사들고 돌아서곤 했지요. 생각해보면 광복을 맞은 지 불과 20년도 안 됐던 시기였습니다. 중간에 한국전쟁을 겪고, 4·19 혁명과 5·16 군사 정변이라는 역사적 사건들을 겪어낸 후에 이제 조금씩 일상의 재미를 찾아가던 때… 사람들은 아직은 상대의 언어가 여전히 익숙했던 것도 사실이었지요. 그것은 식민지 시절, 본의 아니게 몸에 익숙해졌던 것들 때문에 습관처럼 돼버린 무엇이 아니었을까… 당시의 여성잡지의 표지 인물로 가장 많이 등장했던 인물이 바로 미치코 왕세자 비었습니다. 이제 왕실로 시집온 지 얼마 되지 않았던 그는 일본에서는 단연 화제의 인물이었고 잡지에서는 앞다투어 그의 사진을 표지에 실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보다 몇년 전에는 결혼식 때는 텔레비전이 엄청나게 팔려나가 일본이 대량소비사회로 진입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분석까지 나왔습니다. 남의 나라… 그것도 우리를 식민지배했던 나라의 왕세자비가 뭐가 그리 관심의 대상이었을까 싶기도 했지만… 그의 얼굴이 표지로 등장한 잡지들은 서울 명동 골목에서도 꽤 많이 팔려나갔습니다. 그리고 50여 년… 그의 얼굴이 젊음에서 노년으로 옮겨가는 동안애 그 얼굴은 조금씩 더 온화해져 가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사이에 한국과 일본의 관계는 부침을 거듭하면서도 결론은 늘 변하지 않은 것으로 귀결되곤 했습니다. 오늘 그 일본 왕이 퇴위하는 날이라는데…

사실 한·일 관계는 언제가 최악이랄 것도 없이 요즘도 최악이란 평가를 듣고 있죠.

 

전범이었던 그의 부친에 대한 반작용이랄까

 

"일본이 한반도 여러분께 크나큰 고통을 안겨준 시대가 있었고 그에 대한 슬픔은 항상 기억에 남아 있다"

- 아키히토 일왕 (1998년 김대중 전 대통령 방일 당시)

 

오늘 퇴위한 일왕은 그래도 한일 관계에 대해선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입장이었고

 

그래서 오늘의 퇴위사에서도 사람들은 막 나가는 아베와는 다른 무엇인가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일본과 세계 여러분들의 안녕과 행복을 기원합니다"

- 2019430, 아키히토 일왕 퇴위사

 

자신들이 저질렀던 일들에 대한 사과가 그토록 어려운 저 땅의 정치인들에게 그의 진정성 있는 한마디가 필요했던 오늘

 

그의 옆에 미치코 왕비는 여전히 온화한 얼굴로 서 있었으니

 

이래저래 또 한 시대가 가는데

 

새로 오는 시대에는 무엇이 변할 것인가

 

아니면 변하지 않을 것인가

 

오늘의 앵커브리핑이었습니다(2019.4.30)


☞ 손석희의 앵커브리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