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의 앵커브리핑을 시작하겠습니다.

대구광역시 동서를 가로지르며 달리는 시내버스의 번호는 518번.

1998년부터 운행을 시작한 이 버스는 대구전자공고와 2·28 중앙공원 앞을 돌아나갑니다.

우연히 붙여진 번호였지만, '518번' 그 번호는 묘한 여운을 남깁니다.

이른바 '보수의 심장'이라 하는 대구 한복판을 달리는 '오일팔' 버스라니…

그러나 생각해보면 대구는 2·28 민주운동으로 기억되는 지역이지요.

2·28 민주 운동
1960년 대구 지역 고등학생들이 이승만 정권 부정부패에 항거하여 일으킨 민주화운동
(자료 : 2·28 민주운동 기념사업회)

1960년 독재에 항거하는 시민이 행진하던 거리에 '오일팔' 버스가 달리는 것은…

어찌 보면 '운명' 같아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며칠 전부터 광주광역시 시내에는 무등경기장과 옛 전남도청 자리를 지나가는 228번 버스가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10년 전부터 대구와 광주가 시도하고 있는 '달빛동맹' 입니다.

달빛동맹
2009년부터 시작된 '달구벌' 대구와 '빛고을' 광주의 도시 교류

달구벌과 빛고을은 5·18 버스의 짝꿍으로 2·28 버스를 만들어서 함께 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입맛도 말씨도 서로 다르지만 이들은 민주화를 열망하던 역사를 공유한 사람들이지요.

"당 소속 일부 국회의원들이 저지른 상식 이하의 망언…충심으로 사과드립니다…대구시민들 다수도 저와 같은 마음일 것입니다."
- 권영진, 대구시장

정치인들이 만들어 놓은 뿌리 깊은 분열과 왜곡에 반대하는 그들은 서로 공존하고자 애쓰고 있는 중입니다.

시간을 거슬러 지난 2000년, 부산의 거리 한복판…  

"동과 서를 하나로 합쳐서 광주에서 '콩'이면 부산에서도 '콩'이고 대구에서도 '콩'인 옳고 그름을 중심으로 해서"
- 영화 < 노무현과 바보들 > 2007년 4월 1일 제16대 총선 부산 거리유세 연설

그는 정치 1번지, 종로를 두고 모두가 말리는 지역으로 내려갔습니다.

'바보' 소리를 들어가며 그가 무너뜨리고자 했던 것은 작은 나라를 조각내듯 지배하는 견고한 지역 장벽이었습니다.

물론 그의 정치역정이 모두 성공한 것은 아니어서… 

대통령이 된 이후에는 "이게 다 노무현 때문" 이라는 유행어까지 등장했지요.

축구 대표팀이 져도, 비가와도, 연예인이 실수를 해도…

사람들은 그 유행어를 입에 달고 살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얻은 카타르시스는 과연 온당한 것이었을까…

어리석어 보였던 그의 시도들은 하나둘 조금씩 뿌리를 내려서 견고한 장벽은 조금씩 허물어지고 있으니…

달구벌을 달리는 '오일팔' 번 버스와 빛고을을 달리는 '이이팔' 번 버스…

오늘날 지역을 넘어 함께 가고자 하는 끊임없는 시도들…

따지고 보면 이것도 다는 아니어도 적어도 어느 정도는 노무현 때문이 아닐까…

오늘의 앵커브리핑이었습니다. (2019.5.23)


손석희의 앵커브리핑 

[손석희의 앵커브리핑] '늙은 군인의 노래'

Newsroom 2019. 5. 18. 10:41 Posted by applyingusa

뉴스룸의 앵커브리핑을 시작하겠습니다. 노래 값은 막걸리 두 말이었습니다. 1976년의 겨울, 퇴역을 앞둔 나이 든 군인은 곡을 쓸 줄 안다는 젊은 군인을 찾아가서 노래를 한 곡 만들어 달라 부탁했습니다. 나 태어난 이 강산에 군인이 되어 꽃피고 눈 내리기 어언 삼십 년 - 김민기 '늙은 군인의 노래' 30년간 군대에 청춘을 바친 노병의 애환과 설움은 막걸리 적신 가사와 함께 만들어져서 전국의 병영으로 퍼져나갔으나… 가사가 군의 사기를 떨어뜨린다는 이유로 노래는 금지곡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노래는 잊혀지지 않았습니다. 노래는,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계속 불리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몇 달 전에 뉴스룸에서 만난 김민기 씨는 자신이 TV에서 보았던 기묘한 장면을 이야기했습니다. 5월의 광주에서 총칼을 든 계엄군이 이 노래를 부르며 행진하는데… 다른 쪽을 보니 시위대 역시 같은 노래를 부르고 있더라… "계엄군이 저 노래를 부르며 지나가고 시위대도 그 노래를 부르는 거예요. 노래라는 게 참 묘한 거구나" - 김민기, 가수(2018년 9월 13일 JTBC '뉴스룸') 계엄군의 태극기와 시민군이 흔들었던 태극기. 그들은 같은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 기묘하고도 참담했던 시대의 초상이었습니다. 그리고 지나간 39년의 시간. 진실을 말할 수 없었던 사람들에게 그 시간은 너무나 길었을 것입니다.


(2019.5.14)


☞ 손석희의 앵커브리핑

[손석희의 앵커브리핑] 'The Sound of Silence'

Newsroom 2019. 5. 7. 22:54 Posted by applyingusa

뉴스룸의 앵커브리핑을 시작하겠습니다.

 

< The Sound of Silence >

- 사이먼 앤드 가펑클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사이먼 앤드 가펑클''The Sound of Silence'는 우리말로 바꾸어보면 '침묵의 소리'라는 뜻이 됩니다.

 

고요함을 뜻하는 침묵이 소리를 가진다 하니

 

논리적으로 본다면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이 되겠지요.

 

그러나 아무도 그 표현이 틀렸다고 지적하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유치환 - '깃발')"이라든가 "찬란한 슬픔의 봄(김영랑 - '모란이 피기까지는')" 이런 표현처럼

 

예술에서 사용되는 시적 허용은 미묘한 마음의 떨림을 담아서 공감을 전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것이 예술이 아닌, 현실에서 쓰일 때

 

그것은 종종 역설과 조롱의 방식으로 바뀌기도 합니다.

 

치킨호크, '매의 흉내를 내는 닭'

 

베트남전이 한창이던 1960년대 미국 정치권에서는 군대에는 가보지도 않은 채, 국민에게만 참전을 강요하는 정치권 매파를 비판하는 단어가 유행했습니다.

 

겁쟁이를 의미하는 '치킨'과 강경파를 뜻하는 '호크'가 합해진 '겁쟁이 강경파'라는 단어가 생겨났던 것이지요.

 

뿐만 아니라 의미와 개념이 서로 모순되는 표현들은 우리의 일상에도 넘쳐나서

 

'증세 없는 복지'라든가, '클린 디젤' '뜨거운 아이스아메리카노' 등등 앞뒤가 맞지 않는 단어들이 대중을 혼란스럽게 만들기도 합니다.

 

이즈음의 국회는 어떤가

 

'좋은 독재''나쁜 독재'론이 그렇고 이른바 '동물 국회'를 막기 위해서 태어난 '정치 선진화법'과 그 안에서 다시 나타난 '동물 국회'

 

마치 뫼비우스의 띠와 같은 모순들이 지난 한 주 내내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국회는 다시 장내와 장외로 갈라서는 파열음

 

그 파열음은 과연 시끄러운 것일까, 아니면 차라리 침묵에 속하는 것일까.

 

침묵의 소리

 

합리적으로 본다면 이치에 맞지 않는 제목을 사용한 그 곡의 가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사람들은 말하지 않고 이야기하고, 귀 기울이지 않고 들으며그리고 아무도 감히 그 침묵의 소리를 깨뜨리지 못했지"

- 사이먼 앤드 가펑클 <The Sound of Silence >

 

그리고 이 곡을 함께 부른 아트 가펑클은 말합니다.

 

"이 곡은소통하지 못하고, 그래서 서로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무능함에 대한 곡입니다."

- 아트 가펑클

  

오늘의 앵커브리핑이었습니다(2019.5.6)


손석희의 앵커브리핑

 

뉴스룸의 앵커브리핑을 시작하겠습니다. 1960년대 서울 명동 골목에는 일본 잡지 파는 가게가 줄지어 있었습니다. 각종 여성 잡지들이 열을 맞춰 놓여있고 사람들은 들척들척 들었다 놨다 하다가… 단골 구독하던 잡지를 하나 찾아내 사들고 돌아서곤 했지요. 생각해보면 광복을 맞은 지 불과 20년도 안 됐던 시기였습니다. 중간에 한국전쟁을 겪고, 4·19 혁명과 5·16 군사 정변이라는 역사적 사건들을 겪어낸 후에 이제 조금씩 일상의 재미를 찾아가던 때… 사람들은 아직은 상대의 언어가 여전히 익숙했던 것도 사실이었지요. 그것은 식민지 시절, 본의 아니게 몸에 익숙해졌던 것들 때문에 습관처럼 돼버린 무엇이 아니었을까… 당시의 여성잡지의 표지 인물로 가장 많이 등장했던 인물이 바로 미치코 왕세자 비었습니다. 이제 왕실로 시집온 지 얼마 되지 않았던 그는 일본에서는 단연 화제의 인물이었고 잡지에서는 앞다투어 그의 사진을 표지에 실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보다 몇년 전에는 결혼식 때는 텔레비전이 엄청나게 팔려나가 일본이 대량소비사회로 진입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분석까지 나왔습니다. 남의 나라… 그것도 우리를 식민지배했던 나라의 왕세자비가 뭐가 그리 관심의 대상이었을까 싶기도 했지만… 그의 얼굴이 표지로 등장한 잡지들은 서울 명동 골목에서도 꽤 많이 팔려나갔습니다. 그리고 50여 년… 그의 얼굴이 젊음에서 노년으로 옮겨가는 동안애 그 얼굴은 조금씩 더 온화해져 가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사이에 한국과 일본의 관계는 부침을 거듭하면서도 결론은 늘 변하지 않은 것으로 귀결되곤 했습니다. 오늘 그 일본 왕이 퇴위하는 날이라는데…

사실 한·일 관계는 언제가 최악이랄 것도 없이 요즘도 최악이란 평가를 듣고 있죠.

 

전범이었던 그의 부친에 대한 반작용이랄까

 

"일본이 한반도 여러분께 크나큰 고통을 안겨준 시대가 있었고 그에 대한 슬픔은 항상 기억에 남아 있다"

- 아키히토 일왕 (1998년 김대중 전 대통령 방일 당시)

 

오늘 퇴위한 일왕은 그래도 한일 관계에 대해선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입장이었고

 

그래서 오늘의 퇴위사에서도 사람들은 막 나가는 아베와는 다른 무엇인가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일본과 세계 여러분들의 안녕과 행복을 기원합니다"

- 2019430, 아키히토 일왕 퇴위사

 

자신들이 저질렀던 일들에 대한 사과가 그토록 어려운 저 땅의 정치인들에게 그의 진정성 있는 한마디가 필요했던 오늘

 

그의 옆에 미치코 왕비는 여전히 온화한 얼굴로 서 있었으니

 

이래저래 또 한 시대가 가는데

 

새로 오는 시대에는 무엇이 변할 것인가

 

아니면 변하지 않을 것인가

 

오늘의 앵커브리핑이었습니다(2019.4.30)


☞ 손석희의 앵커브리핑